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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니가타 역사서 "사도광산에 조선인 1천200명 연행…갱내 노동"

by 인포 브레인 2024. 7. 6.

니가타현 사도 광산의 어두운 역사: 조선인 강제 노동의 진실
니가타현 사도 광산의 어두운 역사: 조선인 강제 노동의 진실

 

日니가타 역사서 "사도광산에 조선인 1천200명 연행…갱내 노동"

일본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니가타현 사도 광산은 그 어두운 역사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특히 조선인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강제 노동을 했다는 기록이 니가타현 지역 역사서와 시민단체의 조사 결과 등을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교도통신은 사도 광산에서 전시에 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동원되어 일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일본은 당시 노동력을 조달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조선인들을 징용하여 광산과 군수공장에 동원했습니다.

니가타현의 역사서에 기록된 조선인 강제 노동

니가타현 당국이 1988년에 발행한 '니가타현사 통사편8 근대3'은 사도 광산에서의 조선인 강제 노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1939년에 시작된 노무동원 계획이 '모집', '관(官) 알선', '징용'으로 명칭이 변했지만, 조선인을 강제적으로 연행한 사실은 동일하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1942년 발표 시점에서 니가타현 내 조선인 노동자는 미쓰비시광업 사도 광산이 가장 많았으며, 총 802명이었다고 합니다.

니가타현사는 또한 조선인 노동자들이 민족 차별 임금에 불만을 느껴 도망치거나 파업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미쓰비시 측은 '노골적인 열등 민족관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며 문제의 원인을 단정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아이카와마치의 기록과 조선인 노동자들의 증언

니가타현 사도시에 있던 옛 지자체인 아이카와마치(相川町)가 1995년에 펴낸 '사도 아이카와의 역사 통사편 근현대'는 1945년 3월에 조선인 모집이 마지막으로 이루어졌으며, 총 1,200명이 사도 광산에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조선인들이 복수의 숙소에 수용되어 일본인보다 더 많은 갱내 노동을 했다는 사실을 숫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992년 시민단체가 진행한 청취 조사에서는 강제동원 경험자 중 한 명이 매일 황민화 교육을 받았으며, 말을 듣지 않으면 구타를 당하는 등 가혹한 처우를 받았다고 증언했습니다.

황민화는 일왕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는 교육을 뜻합니다.

역사와 마주해야 할 일본 정부의 책임

요시자와 후미토시 니가타국제정보대 교수는 조선인 강제노동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니가타현과 사도시가 지역 역사를 남기고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일본 정부가 사실을 인정하고 역사와 마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또한 조선인 노동자들의 실태와 생활을 알 수 있도록 환경을 정비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유네스코의 권고와 일본 정부의 대응

일본은 사도 광산 유산 시기를 에도시기로 한정하여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동 등 전체 역사를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이에 대해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전체 역사를 현장 레벨에서 포괄적으로 다루는 설명·전시 전략을 책정하고 시설과 설비 등을 갖추라고 권고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에도시기 이후 유산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역을 제외하라는 이코모스의 권고를 수용하겠다는 뜻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한국 정부와 이코모스가 요구하는 '전체 역사 반영'에 대해서는 명확한 방침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사도 광산의 세계유산 등재 여부

사도 광산의 세계유산 등재 여부는 이달 하순 인도 뉴델리에서 열리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결정될 예정입니다.

한국과 일본은 모두 21개국으로 구성된 세계유산위원회 위원국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도 광산의 어두운 역사가 어떻게 반영될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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